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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일 역사 속의 우리 땅 독도
작성일 2017.08.11 조회수 6221

한일 역사 속의 우리 땅 독도

동북아역사재단 편

 I. 한국 주권의 상징, 독도


독도는 맑은 날이면 울릉도에서 보이는 거리에 있다. 조선시대에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강원도 울진현에 속해 있었으며,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에는 울도(울릉도) 군수의 관할로 되었다. 독도는 20세기 초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첫 희생물로서 일본에 빼앗겼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우리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독도는 한국의 독립과 주권의 상징이 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1월 전시내각의 의결로 독도를 은밀히 자국 영토로 편입하였다. 5년 후에 한국을 통째로 차지하게 되는 일본이서둘러 독도를 먼저 가지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늘에서 본 독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요충지로서 독도가 필요했다. 그런데 일본은 이미 1904년 2월에 강압적으로 체결한 ‘한일의정서’에 따라 대한제국의 영토 중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임의로 점령, 수용할 수 있었다. 굳이 독도를 영토로 편입하지 않더라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일본이 독도를 먼저 자국 영토로 편입한 것은 당시 일본의 불확실한 정세 전망과 관계가 있었다. 일본 외무성은 이미 1894년부터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기 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이는 1881년 프랑스가 무력을 앞세워 튀니지를 자국의 보호령으로 만든 바르도 조약(Treaty of Bardo)의 선례에 따른 것으로, 일본은 서양 열강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식민지 정책 중 조선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을 연구했던 것이다. 1905년 1월의 시점에서는 아직 러일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서도 삼국간섭(The Triple Intervention, 1895)에 의해 요동반도를 포기한 경험이 있는 일본으로서는 조선 문제의 장래를 속단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러일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 향후 러시아의 동해 진출을 저지할 군사적 교두보로서 독도를 먼저 자국 영토로 차지했던 것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이 1905년 1월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한 것은 1910년 주권 늑탈(勒奪)의 첫걸음으로서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독도를 수복한 것은 주권 회복과 완전한 독립의 상징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본과의 정상적 외교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제3대 외무부 장관 변영태는 일본의 독도 도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역사에 새길 만한 명문을 남겼다.


     “독도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물이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독도는 다시 우리의 품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 독립의 상징이다. 이 섬에 손을 대는 자는 모든 한민족의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단 몇 개의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겨레 영예의 닻이다. 이것을 잃고서야 어떻게 독립을 지킬 수가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 탈취를 꾀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Ⅱ. 일본의 독도 침탈과 한국 병합


1. 19세기말 한반도 정세: 일본의 지배력 확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후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하면서 양국 간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월한 지위는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확립되었다. 그 뒤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심지어 1895년 10월 8일에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주한일본 공사의 지휘로 일본 경찰과 낭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했기 때문에 일본에게는 제거의 대상이었다.

이어서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은 사실상 일본군의 점령지로 전락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영토 중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었다. 같은 해 4월에는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사령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한국전역에 확대 배치하였다. 1905년 7월까지 일본군이 군용지로 사용하기 위해 강제 수용하겠다고 고지한 땅은 약 3,223만㎡나 되었다


2. 독도에 대한 일본의 관심: 러일전쟁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는 1869년 3명의 외무성 관료를 파견해서 조선의 사정을 염탐하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에 속하게 된 경위를 파악하게 했다. 이들의 조사를 바탕으로 1870년에 작성된 〈조선국교제시말 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의 “죽도(울릉도)・송도(독도)가 조선의 부속이 된 시말”이라는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일본 외무성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반도와 독도의 위치


그로부터 7년 뒤인 1877년의 태정관 지령(太政官指令)에서도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재확인하였다. 그런데 러일전쟁을 계기로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기 위한 일본의 움직임이 갑자기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러일전쟁 초기부터 일본군은 울릉도와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 두 섬은 남하하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와 일본의 연합함대가 마주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러시아 발틱 함대의 동해 진입을 감시하기 위한 망루 설치의 최적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략적 고려에 따라 1904년 9월 1일에 일본군은 울릉도 서쪽과 남쪽에 각각 감시 망루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독도에도 망루를 설치하기 위해 군함 니타카(新高) 호를 파견하여 조사하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니타카 호의 1904년 9월 25일자 항해일지에 ‘독도(獨島)’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이는 1905년의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에 등장하는 독도의 일본식 명칭인 ‘죽도(竹島)’보다 더 이른 시기에 이미 한국의 지명인 ‘독도’가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독도는 울릉도 주민들에 의해 분명히 인지되고 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1904년 9월 29일에 시마네 현의 기업적인 어업가인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는 일본 정부에 ‘독도영토편입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나카이는 독도에 서식하는 강치포획 사업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처음에 그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알고 일본 정부를 통해 한국에 임대 청원서를 제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해군성 수로국장 기모쓰키 가네유키(肝付兼行) 등의 사주를 받고 다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청원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했던 것이다.

나카이가 ‘독도 영토편입 청원서’를 제출하자 내무성 이노우에(井上) 서기관은 이에 반대했다. “한국 땅이라는 의혹이 있는 쓸모없는 암초를 편입할 경우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 외국 여러 나라들에게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려고 한다는 의심을 크게 갖게 한다(나카이 요자부로, 〈사업경영개요(事業經營槪要)〉, 1906)”는 이유에서였다.

내무성이 청원을 기각하려 하자 나카이는 외무성 정무국장인 야마자 엔지로(山座圓次郞)를 찾아갔다. 그의 반응은 내무성과 완전히 달랐다. “지금 시국이야말로 (독도의) 영토편입이 필요하다.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고 무선 또는 해저전선을 설치하면 적함을 감시하기 좋지 않겠는가?”(나카이 요자부로, 〈사업경영개요〉, 1906)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04년 11월 일본 해군은 군함 쓰시마(對馬) 호를 독도에 파견하여 감시 망루와 통신시설 설치가 적합한지에 대해 조사하였다. 얼마 뒤인 1905년 1월 1일에 뤼순(旅順)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자 러시아 발틱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목적지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독도는 발틱 함대를 격파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3.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


러일전쟁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일본 전시내각은 독도 침탈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905년 1월 10일 내무대신 요시카와 아키마사(芳川顯正)는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에게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이라는 비밀공문을 보내 독도 편입을 위한 내각회의의 개최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월 28일에 열린 내각회의에서 독도의 편입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1905년 2월 22일 시마네 현 지사가 독도를 오키 도사(隱岐島司) 소관으로 정한다는 소위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를 포고했다는 것이 일본 측의 주장이다.

그러나 당시 독도는 결코 무주지가 아니었다. 일본 메이지 정부는 이미 1877년에 5개월의 조사 끝에 독도는 역사적으로 일본과 무관한 땅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또한 1900년에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제41호를 통해 ‘석도’(독도)가 울도(울릉도) 군수의 관할 하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렇다면 적어도 1905년 1월 시점에서 일본 정부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일방적으로 독도 편입을 결정한 사실은 영토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유효한 법률적 행위로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의 원본 조차 없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1945년 8월 24일 시마네 현 청사 화재 당시 원본이 소실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일본은 1905년 독도 영토편입에 대해 대한제국으로부터 이의 제기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의 독도 영토편입 과정에서 이해관계 당사국인 대한제국 정부에 대한 통고나 국제적인 공시는 전혀 없었다. 심지어 전쟁 중에 은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시 대한제국과 제3국 정부는 물론 일반 일본인들조차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 못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불법적인 독도 영토편입을 처음 인지한 것은 을사늑약 이후인 1906년 3월이 되어서였다. 당시 울릉도를 방문한 일본 시마네 현 관리들은 울도(울릉도) 군수 심흥택에게 일본의 독도 영토편입 사실을 알렸고, 이 사실은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를 통하여 서울의 중앙정부에 보고되었다.

이 보고를 받은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은 일본의 행위를 비난하는 한편, 사실 관계를 조사할 것을 지시했지만 외교적으로 항의할 길은 봉쇄되어 있었다. 이미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뒤였기 때문이다.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 보고서> (1906)



        Ⅲ. 독도는 한국의 고유영토


1. 울릉도와 독도는 한 세트: 지리적 근접성


1)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

울릉도와 독도는 지리적으로 서로 가시거리 내에 있는 하나의 생활공간으로 본도(本島)와 속도(屬島)의 관계에 있다. 독도는 맑은 날 울릉도에서 육안으로도 볼 수 있다. 울릉도에서 촬영한 독도 사진이 이를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 동력선이 없던 과거에는 육안으로 보이고 오갈 수 있는 섬들은 같은 생활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자연스럽게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바라본 독도(울릉도 도동 시내를 배경으로, 2011년 11월 12일 촬영)

울릉도와 독도의 가시거리


《세종실록》 〈지리지〉(1454)에도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땅은 일본 북서쪽 끝에 위치한 시마네 현 오키 섬이다. 하지만 오키섬에서는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으로 87.4km의 거리에 있지만, 일본 오키 섬에 서는 북서쪽으로 157.5km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2) 독도는 일본 경계 밖의 섬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동해에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 두 개의 섬이 존재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1)에 수록된 〈팔도총도〉에도 강원도 동쪽 바다에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 두 개의 섬이 존재하는 것이 명확히 그려져 있다. 특히 《동국문헌비고》(1770)에는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 땅인데, 우산은 바로 왜인들이말하는 송도(松島)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당시 일본은 독도를 송도로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1454, 왼쪽)와 《은주시청합기》(1667, 오른쪽)


독도에 대해 언급한 일본 최초의기록은 1667년 일본 이즈모(出雲) 지방의 관료 사이토 간스케(齋藤勘助)가 편찬한 풍토기(風土記)인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紀)》다.

《은주시청합기》는 “은주(隱州)는 북해 가운데 있다. …… 북서쪽으로 1박 2일을 가면 송도(독도)가 있다. 또 이곳에서 다시 하루 낮을 가면 죽도(울릉도)가 있다.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이 섬에서 고려(조선)를 보는 것이 운주(雲州)에서 은주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일본의 북서쪽 경계는 이주(은주: 오키 섬)를 한계로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일본인들이 독도를 그들의 영토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다.


2. 조선시대의 울릉도·독도 관할: 역사적 정당성


1) 17세기 안용복의 활동과 울릉도 쟁계

《숙종실록》에 따르면, 조선의 어부 안용복은 숙종 19년(1693) 울릉도에서 어로 활동을 하던 중 일본 오야(大谷) 가문의 어부들과 충돌하여 일본 오키 섬까지 끌려갔다. 오키 도주는 안용복 일행을 돗토리번(鳥取藩)의 호키 국(伯耆國) 태수에게 호송했는데, 안용복은 호키 태수 앞에서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조하며 일본인들의 출어를 금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호키 태수는 이를 도쿠가와 막부에 보고하고,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서계를 써준 후 안용복 일행을 조선으로 귀국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이른바 ‘울릉도 쟁계(爭界)’가 발생하였다.

숙종 22년(1696) 일본인 어부들과 울릉도에서 또 조우한 안용복은 오키 섬을 재차 방문하여 오키 도주에게 일본인들의 계속되는 침범을 근절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안용복의 활동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은 대마도주를 막부의 대리인으로 하여 울릉도의 영유권을 놓고 최초로 중앙정부 차원의 외교적 접촉을 하였다. 그 결과 1696년 일본 막부는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 도해를 금지하였고, 1699년에 울릉도의 조선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당시 독도는 울릉도와 하나의 세트처럼 다루어졌다.


〈원록구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1696)


안용복 사건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1997년)된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의 활동과 도쿠가와 막부의 결정은 원록(元祿) 시대(1688~1704)의 일본 측 기록에도 잘 나타나있다. 또한 2005년에는 1696년 안용복의 제2차 도일 때 일본 측이 안용복 일행에 대해 조사한 보고서가 발견되었다. 바로 〈원록구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다. 이 문헌에는 안용복이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한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숙종실록》 등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2) 영토관리 제도로서의 수토제

울릉도 쟁계 이후 조선은 숙종 20년(1694)에 장한상(張漢相)을 파견하여 울릉도를 수토(搜討)하였다. 이를 계기로 3년마다 한 차례씩 울릉도의 수토가 제도화되었다. 수토란 울릉도에 불법으로 입도한 조선 백성과 일본인을 수색해서 처벌하는 것을 말하는데, 실제로는 영토관리의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흉년을 이유로 신하들이 울릉도 수토의 연기를 건의하자, 영조는 “이 땅(울릉도)을 버린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찌 (수토관을) 들여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此地若棄之則已, 不然豈可不爲入送耶)”(《승정원일기》 793책, 영조 11년 1월 17일)라고 대답하였다. 영토수호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또한 울릉도 수토관은 수토를 마친 뒤엔 으레 토산물을 진상(進上)했다. 토산물을 진상하는 행위는 “온 천하가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라는 영토 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울릉도의 진상품은 자단향(紫檀香), 청죽(靑竹), 가지어 가죽(可支魚皮), 석간주(石間朱) 등이었다. 울릉도 수토는 흉년이 들거나 특수한 사정이 생겨서 시행 주기가 변동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1895년에 도감(島監)을 임명해서 울릉도를 관리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3) 19세기 초 일본의 하치에몬 사건과 죽도(울릉도) 도해금지령

1836년 하치에몬(八右衛門)이라는 일본인이 도검, 활, 총 등을 구입해서 배로 죽도(울릉도)에 싣고 가 외국 배들과 밀무역을 하다가 막부에 적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마다(浜田)에 살던 하치에몬이 그 번(藩)의 관료들과 공모하여 몰래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 도해를 시도한 것이었다. 당시 주범인 하치에몬은 사형당하고, 이 사건에 연루된 하마다 번고위 관료들은 할복했다.

이 사건의 결과 도쿠가와 막부는 1837년에 하마다 항을 비롯한 주요 해안에 다음과 같이 ‘죽도(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


죽도(울릉도) 도해금지 경고판


        “하치에몬이 죽도에 도해한 사건과 관련하여 취조를 한 후 하치에몬과 그 외 각각에게 엄한 형벌을 내렸다. 이 섬은 원록(元祿) 시대에 조선국에게 건네주었다. 모든 외국으로의 도해는 엄히 금하였으므로 향후 이 섬에 대해서도 똑같이 명심하여 도해하지 않아야 한다.”


4) 일본의 지적조사와 태정관 지령(1877)

일본 메이지 정부의 최고행정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1877년에 내무성에 하달한 ‘태정관 지령’은 일본이 조선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다. 당시 일본 내무성은 관내의 지적(地籍)조사와 지도 편찬 작업을 하고 있던 시마네 현으로부터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현의 관할 지역에 포함시킬지 여부에 관한 문의를 1876년 10월 16일자로 접수하였다. 내무성은 시마네 현이 제출한 부속 문서 및 17세기 말 이래 일본과 조선 사이의 왕복문서들을 자세히 조사한 끝에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태정관 지령〉 (1877년 3월 29일)


그러나 영토의 범위를 정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내무성에서는 이듬해인 1877년 3월 17일에 최고행정기관인 태정관에 품의서를 제출하였다. 같은 달 20일 태정관은 이에 대해 “죽도 외 일도(竹島外一島)의 건에 대해 본방(本邦)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는 내용의 지령을 내렸다. 여기서 죽도 외 ‘일도’란 독도를 가리키며, ‘본방’은 일본 자국을 의미한다. 이 지령은 3월 29일에 내무성에 하달되었고, 내무성은 4월 9일에 이를 시마네 현에 전달하였다. 즉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공문서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분명히 확인했던 것이다.


3. 대한제국 칙령 제41호(1900): 법적 관할권 행사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은 칙령 제41호를 제정하여 독도에 대한 관할권을 천명하였다. 그에 앞서 1900년 6월 1일, 내부(內部) 시찰관 울도(울릉도) 시찰위원 우용정은 내부대신의 훈령에 따라 울릉도에 파견되었다. 이때 우용정은 ‘울릉도 거류 일인(日人)사건’에 관한 보고서를 상세히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에는 1900년 전후 울릉도에서 일본인의 불법 거주와 벌목을 둘러싼 대한제국과 일본의 대립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일본인들의 울릉도 불법거주와 침탈 행위는 1899년 울릉도를 직접 조사한 프랑스인 라포르트(E. Laporte)의 보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1900)


우용정은 1900년 6월 3일 울릉도 관민에게 정부의 금령을 준수하라는 고시를 선포했다. 또한 울릉도의 삼림 보호와 관련하여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벌목하여 조선(造船)하는 것을 금지하고, 불법적으로 섬에 들어온 백성이 일본인과 협정을 체결하여 느티나무를 벌목하는 것도 금지한다고 고시했다.

또한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은 울릉도 안건과 관련해서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회동한 후, 1900년 9월 12일에 내부대신 이건하에게 하야시가 보내온 조회 내용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이 편선(便船)을 보내주면 주한 일본 영사에게 지시하여 소환장을 발부하고, 관련자를 일본 법정에서 심문한 후 조치할 것이 라고 대한제국 정부에 알려왔다.” 즉,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또한 일본인의 울릉도 거주가 조약 위반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대한제국은 칙령 제41호를 제정하여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도감(島監)을 군수로 개칭, 승격하였다. 그리고 그 관할 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포함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바로 옆에 있는 대섬(대나무섬), 석도는 독도를 의미한다. 1883년에 울릉도가 본격적으로 개척되기 전부터 전라도 사람들이 울릉도로 건너갔고, 그 뒤로 경상도와 강원도 사람들도 점차 이주했다. 이들은 돌로 이루어진 독도를 ‘독섬’이라고 불렀다. 석도의 ‘석(石)’은 ‘돌(독)’을 표기하는 데 한자의 뜻을 사용한 것이고, 독도의 ‘독(獨)’은 ‘독(돌)’을 표기하는 데 한자의 음을 차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돌섬이 곧 독섬이자 석도가 되었던 것이다.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7일 관보(제1716호)에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게재했다. 대한제국은 일본이 주장하는 이른바 ‘독도 영토편입’보다 이미 5년 전에 독도가 울도(울릉도) 군수의 관할 구역에 속하는 우리의 영토라는 사실을 국내외에 천명했던 것이다.



        Ⅳ. 광복 이후의 독도


1.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 회복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과 동시에 한국은 독도를 포함한 과거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유엔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들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모든 지역에서 축출돼야 한다”라고 규정했다. 또한 1945년의 포츠담 선언은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확인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섬과 우리(연합국)가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한한다”라고 규정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에 항복을 선언함과 동시에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다. 그에 기초하여 1946년 1월 29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각서(SCAPIN) 제677호를 통해 일본의 통치와 행정권이 미치는 범위를 앞에서 열거한 4개 섬과 그 주요 부속도서로 한정하고, 독도를 울릉도, 제주도와 함께 일본의영토범위에서 제외되는 도서로 명시하였다.

또한 일제의 침략 및 전쟁 책임과 영토의 범위를 규정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의 제2조 (a)항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일본인들은 이 조약문에 독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1905년에 자국 영토로 편입한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어떤 조약인가?


연합국 최고사령관 행정관할도(부분도) (1946)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패전국’인 일본에 대해 연합국이 주권을 회복시켜 주는 조건으로 여러 가지 제한을 두었다. 즉 패전국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지 권리를 인정하는 성격의 조약이 아니다. 그야말로 승자와 패자 간의 강화조약인 것이다. 따라서 영토에 관한 규정도, 침략의 결과로 팽창한 영토를 최소한의 원래 일본 영토로 축소시키고 ‘제한’하는 것이다. 이것이 카이로 선언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일관된 원칙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자신의 영토를 최대한으로 주장하기 위해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이 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에는 이미 한국 정부가 수립되어 독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주권국가인 한국의 영토 범위를 규율할 수도 없는 것이다.


2. 독도 폭격사건과 한국의 평화선 선언


미군정 말기인 1948년 6월 8일에 독도에서 미 공군의 연습 폭격으로 우리 어민 14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독도는 1947년 9월 16일자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제1778호에 의해 미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되어 있었다. 사고발생 후 미군 당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피해자들에 대해 배상을 하였다. 1950년 6월 8일 한국 정부는 독도에서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제막식을 가졌다.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제막식 모습(1950년 6월 8일)


그러나 미군의 ‘폭격연습’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1952년 9월 15일, 22일, 24일에 걸쳐 연달아 폭격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단장 홍종인)이 독도에 접근하여 상륙하려고 할 때마다 폭격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독도에 상륙하지 못하고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폭격은 단순한 군사훈련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1952년 1월 18일에 대한민국 정부는 4개조로 구성된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국무원 고시 제14호, 일명 평화선 선언)을 공포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 및 1945년에 설정된 맥아더 라인의 폐지에 따라 일본 어선이 우리나라 해역으로 몰려들 것이 예상됨에 따라 취해진 조처로서, 수산물과 광물을 비롯해서 한반도와 그 주변도서의 인접 해양에 있는 모든 자연자원에 대한 우리나라의 권리를 천명하고 해양 경계선을 획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평화선은 당연히 독도 외곽으로 그어졌다.

그러자 일본은 노골적으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며, 한국 정부의 평화선 선언에 대한 대책논의에 착수했다. 1952년 5월 23일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야마모토 도시나가 의원(山本利壽)은 이시하라 간이치로(石原幹市郞) 외무차관에게 다음과 같이 질의했다. “이번 일본의 (미군) 주둔군 연습지 지정 문제와 관련해서 다케시마(독도) 주변이 연습지로 지정된다면, 이 영토권을 일본의 것으로 확인받기 쉽다는 생각에서 외무성이 연습지 지정을 바라고 있는가?” 이에 대해 이시하라 외무차관은 “대체로 그런 발상에서 다양하게 추진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평화선 선언’이 게재된 관보(1952년)와 지도


그로부터 2개월 후인 1952년 7월 26일 미일합동위원회에서는 독도를 미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하고, 일본 외무성은 당일로 외무성 고시 제34호를 통해 이 사실을 공시했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미군은 9월 중 세 차례의 독도 폭격연습을 단행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1953년 7월 13일 외교문서(구술서)에서 독도 폭격사건을 독도 영유권 주장의 논거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정황들을 감안할 때 독도 폭격사건은 일본이 6・25전쟁으로 한국이 혼란한 틈을 이용해서 독도를 자국 영토로 인정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군을 끌어들여 계획한 결과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 한국 외무부는 독도 폭격사건에 대해 1952년 11월 10일에 주한미국대사관에 공문을 보내어, 독도는 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폭격사건의 재발방지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12월 4일 주한미국대사관은 한국 외무부에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보냈다. 그 후 미 극동군사령부는 독도에 대한 폭격연습을 중지하였고, 1953년 3월 19일에 열린 미일합동위원회에서 독도를 폭격연습지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미국이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토주권 주장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3. 독도 수호와 독도에 대한 이용·관리


일본은 1952년 맥아더 라인이 폐지되고 6・25전쟁으로 한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독도에 접근하거나 상륙하는 등 의도적 도발을 자행했다. 일본의 도발 행위는 1953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10여 차례나 일어났다. 이와 같이 도발 행위가 빈번해지자 급기야 울릉도 주민들이 스스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여 독도를 수호하기 위해 나섰다. 한국은 그 후 계속 독도 주변 수역을 관할하는 한편, 독도에 경찰을 파견하여 경비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1947년 이후 1953년까지, 심지어 6・25전쟁 기간 중에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학술조사를 실시하는 등 영토주권을 구체적으로 행사하면서 독도를 지켜왔다. 또한 1965년부터 독도 주변 수역에서 어업을 하던 울릉도 주민 최종덕 씨는 독도에 상시 거주시설을 짓고 해녀와 어부를 고용하여 생활하였으며, 1981년에는 가족과 함께 주민등록을 독도로 이전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91년에는 김성도, 김신열 씨 부부가 독도로 주민등록을 이전하고, 현재 독도 주민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독도는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96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민, 경찰, 공무원 등 40여 명이 생활하고 있다. 독도에 주소를 두고 있는 사람은 22세대 23명이며, 독도를 가족관계등록부 상 등록기준지로 둔 사람도 3,300명에 이른다(2016년 12월 31일기준). 2005년 대한민국 정부가 ‘독도의 입도 제한조치’를 해제한 이래 매년 10만 명 이상의 내외국인이 독도를 방문하고 있으며, 그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울릉군 독도관리사무소에서는 2010년 12월부터 독도 방문객을 대상으로 ‘독도명예주민증’을 발급하고 있다. 또한 독도에는 유인 등대, 주민숙소, 경비대 숙소, 독도조난어민위령비, 영토표석 등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나타내는 각종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2012년 8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직접 방문하고 기념비도 세웠다.


독도 접안 시설 준공 기념비



        Ⅴ. 일본의 ‘영토문제’ 제기 의도


1.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자가당착


당초 일본은 ‘무주지 선점론’을 내세워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고유영토론’을 내세우고 있다. 일본측의 주장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논리, 즉 무주지여서 편입했다는 주장과 옛날부터 자국의 영토였다는 주장을 억지로 결합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 앞서 본 바와 같이 17세기 이래 일본 스스로 몇 차례나 독도가 자국의 영토가 아님을 인정한 명백한 역사적 증거가 있다.

이러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영유권 주장을 계속해 오고 있다. 일본이 노골적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을 계속하는 데 대해 우리는 일제 식민통치의 고통스런 기억들을 떠올리고, 일본과 진정한 우호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추이


1952년 1월 18일에 한국이 평화선을 선포하자, 일본은 1월 28일에 구술서를 통해 항의하면서 독도 영유권을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1953년 이후에는 일본인들의 독도 불법 상륙과 일본 영토표식 설치도 잇달았다. 1954년 9월 25일에는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한국 정부에 대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회부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1965년 한일 간 기본관계조약의 체결로 한일 양국관계가 정상화되자 일본의 독도 영유권 도발도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 후 일본은 1971년도 《외교청서》에 ‘한국의 독도 불법 점거’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명기하였다. 그에 이어 일본 순시선과 어선의 독도 인접 수역에 대한 침범과 도발이 재개되었다. 1977년에는 한일 양국의 12해리 영해법 선포를 계기로 독도를 둘러싼 갈등이 더욱 고조되었는데, 일본의 신문사, 방송사 항공기가 독도 영공을 잇달아 침범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1978년에는 일본의 《방위백서》에 독도가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1980년대 들어오면서 일본은 더욱 노골적으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1986년 9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일 정기 외무장관회담에서는 일본 측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여파문을일으켰다.

1990년부터는 《외교청서》에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주장을 싣고 있다. 유엔해양법협약이 발효된 1994년 11월 이후 일본은 배타적 경제수역(EEZ, Exclusive Economic Zone) 기점 설정 등 해양법적 논의를 기회로 삼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005년 일본의 시마네 현은 2월 22일을 이른바 ‘죽도(竹島 : 독도)의 날’로 지정하고, 지금까지 ‘죽도의 날’행사를 개최해 오고 있다. 일본의 중앙정부도 고위급 관리를 행사에 참석시키는 형태로 호응하고 있다. 이 행사가 개최되는 시마네 현의 마쓰에(松江) 시는 일본 전국에서 모여든 극우단체의 스피커 차량에서 뿜어대는 호전적인 구호 때문에 일반 시민들이 위협을 느낄 정도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된다.


일본 교과서 검정 관련 긴급 학술회의(동북아역사재단, 2015년 4월 6일)


교과서의 경우, 2008년 7월에 개정된 일본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서 독도 영유권 관련 기술이 최초로 등장했다. 이듬해인 2009년 12월에 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도 같은 맥락으로 영토 교육을 강화하는 기술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2014년 1월과 2017년 6월에는 일본의 중・고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다시 개정하여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보다 직접적인 표현이 삽입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방위백서》와 《외교청서》에서도 독도 영유권 주장이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최근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독도에 대한 도발을 조직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2013년 2월 내각 관방에 영토・주권대책 기획조정실을 신설하고 독도 관련 홍보 등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그 예다.


일본 오키 섬의 독도 관련 선전 입간판(왼쪽)과 일본 시마네 현에서 개최된 ‘죽도의 날’ 행사(오른쪽)


이러한 일본 정부의 도발에 대해 우리 정부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를 부각시키는 한편, 일본 측 주장의 허구성을 반박하고 독도가 우리의 고유한 영토임을 입증할 수 있는 사료 발굴 및 국제법적 근거 수립을 통해 적극 대응하고 있다.


3. 일본의 전략적 의도


현재 일본은 독도, 센카쿠 제도(댜오위다오), 남쿠릴 열도(북방영토) 문제를 일본의 3대 영토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말하는 세 가지의 영토문제는 서로 성격이 다르다.

먼저 센카쿠 제도를 살펴보면, 일본은 이 지역에선 영토문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중국은 최근 들어 이 섬들에 관한 영토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2012년 일본 정부의 센카쿠 제도 국유화 조처에 대해 중국이 강하게 반발한 뒤로 양국 간의 가장 큰 잠재적 분쟁요인이 되고 있다. 한편, 남쿠릴 열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점령한 지역으로서 일본이 이른바 자국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센카쿠 제도와는 정반대의 상황에 있다.

말하자면 일본은 자국의 실효적 지배가 이뤄지고 있는 센카쿠 제도에서는 영토문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반면, 남쿠릴 열도와 관련해서는 역사적으로 자국의 고유영토임을 강조하면서 외교협상으로 영유권을 되찾아오려는 모순된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반면,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가 명백한 독도는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은밀히 훔쳐간 땅이며, 우리나라가 주권을 회복한 이후에 다시 되찾은 것뿐이다. 그 후 한국은 경찰력을 상주시키면서 영토주권을 계속 행사해 오고 있다. 따라서 역사, 국제법, 지리 등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독도와 관련해서는 한일 간에 영토문제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일본이 한국, 러시아, 중국 등 인접국가들과 영토문제를 제기하는 전략적 의도다. 현재 일본처럼 주변의 다른 나라들에 대해 동시에 영토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독도와 해양경비정


그렇다면 그 이면에 숨은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근대 이후 일본은 정권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고 국내의 불만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웃나라들과의 갈등을 조장하는 행태를 보여 왔다. 1875년의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과 1876년의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의 체결, 1894년의 청일전쟁(淸日戰爭) 등은 그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국내정치적으로 볼 때, 오늘날 일본이 영토문제를 빌미로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외부적 갈등을 통해 국민 통합을 유도하려는 고전적 통치술을 답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역내의 군사적 긴장과 정치적 대립을 심화시킴으로써 자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려는 외교적 책략의 의미가 있다. 즉, 자국의 국력만으로는 러시아 및 중국과 대결할 수 없는 일본으로서는 미국과의 굳건한 안보적 동맹관계가 무엇보다 절실하며, 따라서 자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영토문제를 이용해서 주기적으로 역내의 긴장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일본의 무리한 영토문제 제기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심각한 정치적, 군사적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F. Benedict)는 유명한 저서 《국화와 칼 T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외교정책의 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견했다. “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일 사정이 허락되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장된 진영으로 구성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게 될 것이다.” 즉, 일단 국제정세가 분명한 긴장구도라고 판단되면, 일본은 언제든 과거의 군국주의적 행태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영토문제 제기는 동아시아의 심각한 군사적, 정치적 위기를 촉발할 수 있으며, 그러한 상황이 되면 일본은 언제라도 호전적 국가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따라서 우리가 독도에 관한 영토주권을 확고히 지키는 것은 우리의 영토주권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동아시아의 군사적, 정치적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길이 된다.

한일 역사 속의 우리 땅 독도

 

동북아역사재단 편

 

 

 

 

        I. 한국 주권의 상징, 독도


독도는 맑은 날이면 울릉도에서 보이는 거리에 있다. 조선시대에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강원도 울진현에 속해 있었으며,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에는 울도(울릉도) 군수의 관할로 되었다. 독도는 20세기 초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첫 희생물로서 일본에 빼앗겼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우리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독도는 한국의 독립과 주권의 상징이 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1월 전시내각의 의결로 독도를 은밀히 자국 영토로 편입하였다. 5년 후에 한국을 통째로 차지하게 되는 일본이서둘러 독도를 먼저 가지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늘에서 본 독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요충지로서 독도가 필요했다. 그런데 일본은 이미 1904년 2월에 강압적으로 체결한 ‘한일의정서’에 따라 대한제국의 영토 중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임의로 점령, 수용할 수 있었다. 굳이 독도를 영토로 편입하지 않더라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일본이 독도를 먼저 자국 영토로 편입한 것은 당시 일본의 불확실한 정세 전망과 관계가 있었다. 일본 외무성은 이미 1894년부터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기 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이는 1881년 프랑스가 무력을 앞세워 튀니지를 자국의 보호령으로 만든 바르도 조약(Treaty of Bardo)의 선례에 따른 것으로, 일본은 서양 열강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식민지 정책 중 조선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을 연구했던 것이다. 1905년 1월의 시점에서는 아직 러일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서도 삼국간섭(The Triple Intervention, 1895)에 의해 요동반도를 포기한 경험이 있는 일본으로서는 조선 문제의 장래를 속단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러일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 향후 러시아의 동해 진출을 저지할 군사적 교두보로서 독도를 먼저 자국 영토로 차지했던 것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이 1905년 1월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한 것은 1910년 주권 늑탈(勒奪)의 첫걸음으로서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독도를 수복한 것은 주권 회복과 완전한 독립의 상징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본과의 정상적 외교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제3대 외무부 장관 변영태는 일본의 독도 도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역사에 새길 만한 명문을 남겼다.


     “독도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물이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독도는 다시 우리의 품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 독립의 상징이다. 이 섬에 손을 대는 자는 모든 한민족의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단 몇 개의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겨레 영예의 닻이다. 이것을 잃고서야 어떻게 독립을 지킬 수가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 탈취를 꾀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Ⅱ. 일본의 독도 침탈과 한국 병합


1. 19세기말 한반도 정세: 일본의 지배력 확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후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하면서 양국 간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월한 지위는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확립되었다. 그 뒤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심지어 1895년 10월 8일에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주한일본 공사의 지휘로 일본 경찰과 낭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했기 때문에 일본에게는 제거의 대상이었다.

이어서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은 사실상 일본군의 점령지로 전락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영토 중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었다. 같은 해 4월에는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사령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한국전역에 확대 배치하였다. 1905년 7월까지 일본군이 군용지로 사용하기 위해 강제 수용하겠다고 고지한 땅은 약 3,223만㎡나 되었다


2. 독도에 대한 일본의 관심: 러일전쟁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는 1869년 3명의 외무성 관료를 파견해서 조선의 사정을 염탐하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에 속하게 된 경위를 파악하게 했다. 이들의 조사를 바탕으로 1870년에 작성된 〈조선국교제시말 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의 “죽도(울릉도)・송도(독도)가 조선의 부속이 된 시말”이라는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일본 외무성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반도와 독도의 위치


그로부터 7년 뒤인 1877년의 태정관 지령(太政官指令)에서도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재확인하였다. 그런데 러일전쟁을 계기로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기 위한 일본의 움직임이 갑자기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러일전쟁 초기부터 일본군은 울릉도와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 두 섬은 남하하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와 일본의 연합함대가 마주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러시아 발틱 함대의 동해 진입을 감시하기 위한 망루 설치의 최적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략적 고려에 따라 1904년 9월 1일에 일본군은 울릉도 서쪽과 남쪽에 각각 감시 망루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독도에도 망루를 설치하기 위해 군함 니타카(新高) 호를 파견하여 조사하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니타카 호의 1904년 9월 25일자 항해일지에 ‘독도(獨島)’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이는 1905년의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에 등장하는 독도의 일본식 명칭인 ‘죽도(竹島)’보다 더 이른 시기에 이미 한국의 지명인 ‘독도’가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독도는 울릉도 주민들에 의해 분명히 인지되고 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1904년 9월 29일에 시마네 현의 기업적인 어업가인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는 일본 정부에 ‘독도영토편입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나카이는 독도에 서식하는 강치포획 사업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처음에 그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알고 일본 정부를 통해 한국에 임대 청원서를 제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해군성 수로국장 기모쓰키 가네유키(肝付兼行) 등의 사주를 받고 다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청원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했던 것이다.

나카이가 ‘독도 영토편입 청원서’를 제출하자 내무성 이노우에(井上) 서기관은 이에 반대했다. “한국 땅이라는 의혹이 있는 쓸모없는 암초를 편입할 경우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 외국 여러 나라들에게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려고 한다는 의심을 크게 갖게 한다(나카이 요자부로, 〈사업경영개요(事業經營槪要)〉, 1906)”는 이유에서였다.

내무성이 청원을 기각하려 하자 나카이는 외무성 정무국장인 야마자 엔지로(山座圓次郞)를 찾아갔다. 그의 반응은 내무성과 완전히 달랐다. “지금 시국이야말로 (독도의) 영토편입이 필요하다.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고 무선 또는 해저전선을 설치하면 적함을 감시하기 좋지 않겠는가?”(나카이 요자부로, 〈사업경영개요〉, 1906)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04년 11월 일본 해군은 군함 쓰시마(對馬) 호를 독도에 파견하여 감시 망루와 통신시설 설치가 적합한지에 대해 조사하였다. 얼마 뒤인 1905년 1월 1일에 뤼순(旅順)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자 러시아 발틱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목적지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독도는 발틱 함대를 격파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3.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


러일전쟁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일본 전시내각은 독도 침탈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905년 1월 10일 내무대신 요시카와 아키마사(芳川顯正)는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에게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이라는 비밀공문을 보내 독도 편입을 위한 내각회의의 개최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월 28일에 열린 내각회의에서 독도의 편입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1905년 2월 22일 시마네 현 지사가 독도를 오키 도사(隱岐島司) 소관으로 정한다는 소위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를 포고했다는 것이 일본 측의 주장이다.

그러나 당시 독도는 결코 무주지가 아니었다. 일본 메이지 정부는 이미 1877년에 5개월의 조사 끝에 독도는 역사적으로 일본과 무관한 땅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또한 1900년에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제41호를 통해 ‘석도’(독도)가 울도(울릉도) 군수의 관할 하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렇다면 적어도 1905년 1월 시점에서 일본 정부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일방적으로 독도 편입을 결정한 사실은 영토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유효한 법률적 행위로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의 원본 조차 없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1945년 8월 24일 시마네 현 청사 화재 당시 원본이 소실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일본은 1905년 독도 영토편입에 대해 대한제국으로부터 이의 제기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의 독도 영토편입 과정에서 이해관계 당사국인 대한제국 정부에 대한 통고나 국제적인 공시는 전혀 없었다. 심지어 전쟁 중에 은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시 대한제국과 제3국 정부는 물론 일반 일본인들조차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 못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불법적인 독도 영토편입을 처음 인지한 것은 을사늑약 이후인 1906년 3월이 되어서였다. 당시 울릉도를 방문한 일본 시마네 현 관리들은 울도(울릉도) 군수 심흥택에게 일본의 독도 영토편입 사실을 알렸고, 이 사실은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를 통하여 서울의 중앙정부에 보고되었다.

이 보고를 받은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은 일본의 행위를 비난하는 한편, 사실 관계를 조사할 것을 지시했지만 외교적으로 항의할 길은 봉쇄되어 있었다. 이미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뒤였기 때문이다.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 보고서> (1906)



        Ⅲ. 독도는 한국의 고유영토


1. 울릉도와 독도는 한 세트: 지리적 근접성


1)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

울릉도와 독도는 지리적으로 서로 가시거리 내에 있는 하나의 생활공간으로 본도(本島)와 속도(屬島)의 관계에 있다. 독도는 맑은 날 울릉도에서 육안으로도 볼 수 있다. 울릉도에서 촬영한 독도 사진이 이를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 동력선이 없던 과거에는 육안으로 보이고 오갈 수 있는 섬들은 같은 생활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자연스럽게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바라본 독도(울릉도 도동 시내를 배경으로, 2011년 11월 12일 촬영)

울릉도와 독도의 가시거리


《세종실록》 〈지리지〉(1454)에도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땅은 일본 북서쪽 끝에 위치한 시마네 현 오키 섬이다. 하지만 오키섬에서는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으로 87.4km의 거리에 있지만, 일본 오키 섬에 서는 북서쪽으로 157.5km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2) 독도는 일본 경계 밖의 섬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동해에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 두 개의 섬이 존재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1)에 수록된 〈팔도총도〉에도 강원도 동쪽 바다에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 두 개의 섬이 존재하는 것이 명확히 그려져 있다. 특히 《동국문헌비고》(1770)에는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 땅인데, 우산은 바로 왜인들이말하는 송도(松島)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당시 일본은 독도를 송도로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1454, 왼쪽)와 《은주시청합기》(1667, 오른쪽)


독도에 대해 언급한 일본 최초의기록은 1667년 일본 이즈모(出雲) 지방의 관료 사이토 간스케(齋藤勘助)가 편찬한 풍토기(風土記)인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紀)》다.

《은주시청합기》는 “은주(隱州)는 북해 가운데 있다. …… 북서쪽으로 1박 2일을 가면 송도(독도)가 있다. 또 이곳에서 다시 하루 낮을 가면 죽도(울릉도)가 있다.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이 섬에서 고려(조선)를 보는 것이 운주(雲州)에서 은주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일본의 북서쪽 경계는 이주(은주: 오키 섬)를 한계로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일본인들이 독도를 그들의 영토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다.


2. 조선시대의 울릉도·독도 관할: 역사적 정당성


1) 17세기 안용복의 활동과 울릉도 쟁계

《숙종실록》에 따르면, 조선의 어부 안용복은 숙종 19년(1693) 울릉도에서 어로 활동을 하던 중 일본 오야(大谷) 가문의 어부들과 충돌하여 일본 오키 섬까지 끌려갔다. 오키 도주는 안용복 일행을 돗토리번(鳥取藩)의 호키 국(伯耆國) 태수에게 호송했는데, 안용복은 호키 태수 앞에서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조하며 일본인들의 출어를 금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호키 태수는 이를 도쿠가와 막부에 보고하고,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서계를 써준 후 안용복 일행을 조선으로 귀국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이른바 ‘울릉도 쟁계(爭界)’가 발생하였다.

숙종 22년(1696) 일본인 어부들과 울릉도에서 또 조우한 안용복은 오키 섬을 재차 방문하여 오키 도주에게 일본인들의 계속되는 침범을 근절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안용복의 활동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은 대마도주를 막부의 대리인으로 하여 울릉도의 영유권을 놓고 최초로 중앙정부 차원의 외교적 접촉을 하였다. 그 결과 1696년 일본 막부는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 도해를 금지하였고, 1699년에 울릉도의 조선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당시 독도는 울릉도와 하나의 세트처럼 다루어졌다.


〈원록구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1696)


안용복 사건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1997년)된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의 활동과 도쿠가와 막부의 결정은 원록(元祿) 시대(1688~1704)의 일본 측 기록에도 잘 나타나있다. 또한 2005년에는 1696년 안용복의 제2차 도일 때 일본 측이 안용복 일행에 대해 조사한 보고서가 발견되었다. 바로 〈원록구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다. 이 문헌에는 안용복이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한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숙종실록》 등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2) 영토관리 제도로서의 수토제

울릉도 쟁계 이후 조선은 숙종 20년(1694)에 장한상(張漢相)을 파견하여 울릉도를 수토(搜討)하였다. 이를 계기로 3년마다 한 차례씩 울릉도의 수토가 제도화되었다. 수토란 울릉도에 불법으로 입도한 조선 백성과 일본인을 수색해서 처벌하는 것을 말하는데, 실제로는 영토관리의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흉년을 이유로 신하들이 울릉도 수토의 연기를 건의하자, 영조는 “이 땅(울릉도)을 버린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찌 (수토관을) 들여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此地若棄之則已, 不然豈可不爲入送耶)”(《승정원일기》 793책, 영조 11년 1월 17일)라고 대답하였다. 영토수호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또한 울릉도 수토관은 수토를 마친 뒤엔 으레 토산물을 진상(進上)했다. 토산물을 진상하는 행위는 “온 천하가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라는 영토 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울릉도의 진상품은 자단향(紫檀香), 청죽(靑竹), 가지어 가죽(可支魚皮), 석간주(石間朱) 등이었다. 울릉도 수토는 흉년이 들거나 특수한 사정이 생겨서 시행 주기가 변동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1895년에 도감(島監)을 임명해서 울릉도를 관리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3) 19세기 초 일본의 하치에몬 사건과 죽도(울릉도) 도해금지령

1836년 하치에몬(八右衛門)이라는 일본인이 도검, 활, 총 등을 구입해서 배로 죽도(울릉도)에 싣고 가 외국 배들과 밀무역을 하다가 막부에 적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마다(浜田)에 살던 하치에몬이 그 번(藩)의 관료들과 공모하여 몰래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 도해를 시도한 것이었다. 당시 주범인 하치에몬은 사형당하고, 이 사건에 연루된 하마다 번고위 관료들은 할복했다.

이 사건의 결과 도쿠가와 막부는 1837년에 하마다 항을 비롯한 주요 해안에 다음과 같이 ‘죽도(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


죽도(울릉도) 도해금지 경고판


        “하치에몬이 죽도에 도해한 사건과 관련하여 취조를 한 후 하치에몬과 그 외 각각에게 엄한 형벌을 내렸다. 이 섬은 원록(元祿) 시대에 조선국에게 건네주었다. 모든 외국으로의 도해는 엄히 금하였으므로 향후 이 섬에 대해서도 똑같이 명심하여 도해하지 않아야 한다.”


4) 일본의 지적조사와 태정관 지령(1877)

일본 메이지 정부의 최고행정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1877년에 내무성에 하달한 ‘태정관 지령’은 일본이 조선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다. 당시 일본 내무성은 관내의 지적(地籍)조사와 지도 편찬 작업을 하고 있던 시마네 현으로부터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현의 관할 지역에 포함시킬지 여부에 관한 문의를 1876년 10월 16일자로 접수하였다. 내무성은 시마네 현이 제출한 부속 문서 및 17세기 말 이래 일본과 조선 사이의 왕복문서들을 자세히 조사한 끝에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태정관 지령〉 (1877년 3월 29일)


그러나 영토의 범위를 정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내무성에서는 이듬해인 1877년 3월 17일에 최고행정기관인 태정관에 품의서를 제출하였다. 같은 달 20일 태정관은 이에 대해 “죽도 외 일도(竹島外一島)의 건에 대해 본방(本邦)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는 내용의 지령을 내렸다. 여기서 죽도 외 ‘일도’란 독도를 가리키며, ‘본방’은 일본 자국을 의미한다. 이 지령은 3월 29일에 내무성에 하달되었고, 내무성은 4월 9일에 이를 시마네 현에 전달하였다. 즉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공문서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분명히 확인했던 것이다.


3. 대한제국 칙령 제41호(1900): 법적 관할권 행사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은 칙령 제41호를 제정하여 독도에 대한 관할권을 천명하였다. 그에 앞서 1900년 6월 1일, 내부(內部) 시찰관 울도(울릉도) 시찰위원 우용정은 내부대신의 훈령에 따라 울릉도에 파견되었다. 이때 우용정은 ‘울릉도 거류 일인(日人)사건’에 관한 보고서를 상세히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에는 1900년 전후 울릉도에서 일본인의 불법 거주와 벌목을 둘러싼 대한제국과 일본의 대립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일본인들의 울릉도 불법거주와 침탈 행위는 1899년 울릉도를 직접 조사한 프랑스인 라포르트(E. Laporte)의 보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1900)


우용정은 1900년 6월 3일 울릉도 관민에게 정부의 금령을 준수하라는 고시를 선포했다. 또한 울릉도의 삼림 보호와 관련하여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벌목하여 조선(造船)하는 것을 금지하고, 불법적으로 섬에 들어온 백성이 일본인과 협정을 체결하여 느티나무를 벌목하는 것도 금지한다고 고시했다.

또한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은 울릉도 안건과 관련해서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회동한 후, 1900년 9월 12일에 내부대신 이건하에게 하야시가 보내온 조회 내용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이 편선(便船)을 보내주면 주한 일본 영사에게 지시하여 소환장을 발부하고, 관련자를 일본 법정에서 심문한 후 조치할 것이 라고 대한제국 정부에 알려왔다.” 즉,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또한 일본인의 울릉도 거주가 조약 위반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대한제국은 칙령 제41호를 제정하여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도감(島監)을 군수로 개칭, 승격하였다. 그리고 그 관할 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포함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바로 옆에 있는 대섬(대나무섬), 석도는 독도를 의미한다. 1883년에 울릉도가 본격적으로 개척되기 전부터 전라도 사람들이 울릉도로 건너갔고, 그 뒤로 경상도와 강원도 사람들도 점차 이주했다. 이들은 돌로 이루어진 독도를 ‘독섬’이라고 불렀다. 석도의 ‘석(石)’은 ‘돌(독)’을 표기하는 데 한자의 뜻을 사용한 것이고, 독도의 ‘독(獨)’은 ‘독(돌)’을 표기하는 데 한자의 음을 차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돌섬이 곧 독섬이자 석도가 되었던 것이다.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7일 관보(제1716호)에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게재했다. 대한제국은 일본이 주장하는 이른바 ‘독도 영토편입’보다 이미 5년 전에 독도가 울도(울릉도) 군수의 관할 구역에 속하는 우리의 영토라는 사실을 국내외에 천명했던 것이다.



        Ⅳ. 광복 이후의 독도


1.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 회복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과 동시에 한국은 독도를 포함한 과거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유엔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들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모든 지역에서 축출돼야 한다”라고 규정했다. 또한 1945년의 포츠담 선언은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확인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섬과 우리(연합국)가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한한다”라고 규정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에 항복을 선언함과 동시에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다. 그에 기초하여 1946년 1월 29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각서(SCAPIN) 제677호를 통해 일본의 통치와 행정권이 미치는 범위를 앞에서 열거한 4개 섬과 그 주요 부속도서로 한정하고, 독도를 울릉도, 제주도와 함께 일본의영토범위에서 제외되는 도서로 명시하였다.

또한 일제의 침략 및 전쟁 책임과 영토의 범위를 규정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의 제2조 (a)항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일본인들은 이 조약문에 독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1905년에 자국 영토로 편입한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어떤 조약인가?


연합국 최고사령관 행정관할도(부분도) (1946)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패전국’인 일본에 대해 연합국이 주권을 회복시켜 주는 조건으로 여러 가지 제한을 두었다. 즉 패전국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지 권리를 인정하는 성격의 조약이 아니다. 그야말로 승자와 패자 간의 강화조약인 것이다. 따라서 영토에 관한 규정도, 침략의 결과로 팽창한 영토를 최소한의 원래 일본 영토로 축소시키고 ‘제한’하는 것이다. 이것이 카이로 선언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일관된 원칙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자신의 영토를 최대한으로 주장하기 위해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이 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에는 이미 한국 정부가 수립되어 독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주권국가인 한국의 영토 범위를 규율할 수도 없는 것이다.


2. 독도 폭격사건과 한국의 평화선 선언


미군정 말기인 1948년 6월 8일에 독도에서 미 공군의 연습 폭격으로 우리 어민 14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독도는 1947년 9월 16일자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제1778호에 의해 미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되어 있었다. 사고발생 후 미군 당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피해자들에 대해 배상을 하였다. 1950년 6월 8일 한국 정부는 독도에서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제막식을 가졌다.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제막식 모습(1950년 6월 8일)


그러나 미군의 ‘폭격연습’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1952년 9월 15일, 22일, 24일에 걸쳐 연달아 폭격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단장 홍종인)이 독도에 접근하여 상륙하려고 할 때마다 폭격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독도에 상륙하지 못하고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폭격은 단순한 군사훈련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1952년 1월 18일에 대한민국 정부는 4개조로 구성된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국무원 고시 제14호, 일명 평화선 선언)을 공포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 및 1945년에 설정된 맥아더 라인의 폐지에 따라 일본 어선이 우리나라 해역으로 몰려들 것이 예상됨에 따라 취해진 조처로서, 수산물과 광물을 비롯해서 한반도와 그 주변도서의 인접 해양에 있는 모든 자연자원에 대한 우리나라의 권리를 천명하고 해양 경계선을 획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평화선은 당연히 독도 외곽으로 그어졌다.

그러자 일본은 노골적으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며, 한국 정부의 평화선 선언에 대한 대책논의에 착수했다. 1952년 5월 23일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야마모토 도시나가 의원(山本利壽)은 이시하라 간이치로(石原幹市郞) 외무차관에게 다음과 같이 질의했다. “이번 일본의 (미군) 주둔군 연습지 지정 문제와 관련해서 다케시마(독도) 주변이 연습지로 지정된다면, 이 영토권을 일본의 것으로 확인받기 쉽다는 생각에서 외무성이 연습지 지정을 바라고 있는가?” 이에 대해 이시하라 외무차관은 “대체로 그런 발상에서 다양하게 추진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평화선 선언’이 게재된 관보(1952년)와 지도


그로부터 2개월 후인 1952년 7월 26일 미일합동위원회에서는 독도를 미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하고, 일본 외무성은 당일로 외무성 고시 제34호를 통해 이 사실을 공시했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미군은 9월 중 세 차례의 독도 폭격연습을 단행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1953년 7월 13일 외교문서(구술서)에서 독도 폭격사건을 독도 영유권 주장의 논거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정황들을 감안할 때 독도 폭격사건은 일본이 6・25전쟁으로 한국이 혼란한 틈을 이용해서 독도를 자국 영토로 인정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군을 끌어들여 계획한 결과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 한국 외무부는 독도 폭격사건에 대해 1952년 11월 10일에 주한미국대사관에 공문을 보내어, 독도는 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폭격사건의 재발방지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12월 4일 주한미국대사관은 한국 외무부에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보냈다. 그 후 미 극동군사령부는 독도에 대한 폭격연습을 중지하였고, 1953년 3월 19일에 열린 미일합동위원회에서 독도를 폭격연습지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미국이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토주권 주장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3. 독도 수호와 독도에 대한 이용·관리


일본은 1952년 맥아더 라인이 폐지되고 6・25전쟁으로 한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독도에 접근하거나 상륙하는 등 의도적 도발을 자행했다. 일본의 도발 행위는 1953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10여 차례나 일어났다. 이와 같이 도발 행위가 빈번해지자 급기야 울릉도 주민들이 스스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여 독도를 수호하기 위해 나섰다. 한국은 그 후 계속 독도 주변 수역을 관할하는 한편, 독도에 경찰을 파견하여 경비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1947년 이후 1953년까지, 심지어 6・25전쟁 기간 중에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학술조사를 실시하는 등 영토주권을 구체적으로 행사하면서 독도를 지켜왔다. 또한 1965년부터 독도 주변 수역에서 어업을 하던 울릉도 주민 최종덕 씨는 독도에 상시 거주시설을 짓고 해녀와 어부를 고용하여 생활하였으며, 1981년에는 가족과 함께 주민등록을 독도로 이전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91년에는 김성도, 김신열 씨 부부가 독도로 주민등록을 이전하고, 현재 독도 주민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독도는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96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민, 경찰, 공무원 등 40여 명이 생활하고 있다. 독도에 주소를 두고 있는 사람은 22세대 23명이며, 독도를 가족관계등록부 상 등록기준지로 둔 사람도 3,300명에 이른다(2016년 12월 31일기준). 2005년 대한민국 정부가 ‘독도의 입도 제한조치’를 해제한 이래 매년 10만 명 이상의 내외국인이 독도를 방문하고 있으며, 그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울릉군 독도관리사무소에서는 2010년 12월부터 독도 방문객을 대상으로 ‘독도명예주민증’을 발급하고 있다. 또한 독도에는 유인 등대, 주민숙소, 경비대 숙소, 독도조난어민위령비, 영토표석 등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나타내는 각종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2012년 8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직접 방문하고 기념비도 세웠다.


독도 접안 시설 준공 기념비



        Ⅴ. 일본의 ‘영토문제’ 제기 의도


1.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자가당착


당초 일본은 ‘무주지 선점론’을 내세워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고유영토론’을 내세우고 있다. 일본측의 주장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논리, 즉 무주지여서 편입했다는 주장과 옛날부터 자국의 영토였다는 주장을 억지로 결합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 앞서 본 바와 같이 17세기 이래 일본 스스로 몇 차례나 독도가 자국의 영토가 아님을 인정한 명백한 역사적 증거가 있다.

이러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영유권 주장을 계속해 오고 있다. 일본이 노골적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을 계속하는 데 대해 우리는 일제 식민통치의 고통스런 기억들을 떠올리고, 일본과 진정한 우호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추이


1952년 1월 18일에 한국이 평화선을 선포하자, 일본은 1월 28일에 구술서를 통해 항의하면서 독도 영유권을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1953년 이후에는 일본인들의 독도 불법 상륙과 일본 영토표식 설치도 잇달았다. 1954년 9월 25일에는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한국 정부에 대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회부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1965년 한일 간 기본관계조약의 체결로 한일 양국관계가 정상화되자 일본의 독도 영유권 도발도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 후 일본은 1971년도 《외교청서》에 ‘한국의 독도 불법 점거’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명기하였다. 그에 이어 일본 순시선과 어선의 독도 인접 수역에 대한 침범과 도발이 재개되었다. 1977년에는 한일 양국의 12해리 영해법 선포를 계기로 독도를 둘러싼 갈등이 더욱 고조되었는데, 일본의 신문사, 방송사 항공기가 독도 영공을 잇달아 침범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1978년에는 일본의 《방위백서》에 독도가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1980년대 들어오면서 일본은 더욱 노골적으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1986년 9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일 정기 외무장관회담에서는 일본 측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여파문을일으켰다.

1990년부터는 《외교청서》에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주장을 싣고 있다. 유엔해양법협약이 발효된 1994년 11월 이후 일본은 배타적 경제수역(EEZ, Exclusive Economic Zone) 기점 설정 등 해양법적 논의를 기회로 삼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005년 일본의 시마네 현은 2월 22일을 이른바 ‘죽도(竹島 : 독도)의 날’로 지정하고, 지금까지 ‘죽도의 날’행사를 개최해 오고 있다. 일본의 중앙정부도 고위급 관리를 행사에 참석시키는 형태로 호응하고 있다. 이 행사가 개최되는 시마네 현의 마쓰에(松江) 시는 일본 전국에서 모여든 극우단체의 스피커 차량에서 뿜어대는 호전적인 구호 때문에 일반 시민들이 위협을 느낄 정도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된다.


일본 교과서 검정 관련 긴급 학술회의(동북아역사재단, 2015년 4월 6일)


교과서의 경우, 2008년 7월에 개정된 일본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서 독도 영유권 관련 기술이 최초로 등장했다. 이듬해인 2009년 12월에 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도 같은 맥락으로 영토 교육을 강화하는 기술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2014년 1월과 2017년 6월에는 일본의 중・고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다시 개정하여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보다 직접적인 표현이 삽입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방위백서》와 《외교청서》에서도 독도 영유권 주장이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최근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독도에 대한 도발을 조직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2013년 2월 내각 관방에 영토・주권대책 기획조정실을 신설하고 독도 관련 홍보 등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그 예다.


일본 오키 섬의 독도 관련 선전 입간판(왼쪽)과 일본 시마네 현에서 개최된 ‘죽도의 날’ 행사(오른쪽)


이러한 일본 정부의 도발에 대해 우리 정부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를 부각시키는 한편, 일본 측 주장의 허구성을 반박하고 독도가 우리의 고유한 영토임을 입증할 수 있는 사료 발굴 및 국제법적 근거 수립을 통해 적극 대응하고 있다.


3. 일본의 전략적 의도


현재 일본은 독도, 센카쿠 제도(댜오위다오), 남쿠릴 열도(북방영토) 문제를 일본의 3대 영토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말하는 세 가지의 영토문제는 서로 성격이 다르다.

먼저 센카쿠 제도를 살펴보면, 일본은 이 지역에선 영토문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중국은 최근 들어 이 섬들에 관한 영토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2012년 일본 정부의 센카쿠 제도 국유화 조처에 대해 중국이 강하게 반발한 뒤로 양국 간의 가장 큰 잠재적 분쟁요인이 되고 있다. 한편, 남쿠릴 열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점령한 지역으로서 일본이 이른바 자국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센카쿠 제도와는 정반대의 상황에 있다.

말하자면 일본은 자국의 실효적 지배가 이뤄지고 있는 센카쿠 제도에서는 영토문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반면, 남쿠릴 열도와 관련해서는 역사적으로 자국의 고유영토임을 강조하면서 외교협상으로 영유권을 되찾아오려는 모순된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반면,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가 명백한 독도는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은밀히 훔쳐간 땅이며, 우리나라가 주권을 회복한 이후에 다시 되찾은 것뿐이다. 그 후 한국은 경찰력을 상주시키면서 영토주권을 계속 행사해 오고 있다. 따라서 역사, 국제법, 지리 등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독도와 관련해서는 한일 간에 영토문제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일본이 한국, 러시아, 중국 등 인접국가들과 영토문제를 제기하는 전략적 의도다. 현재 일본처럼 주변의 다른 나라들에 대해 동시에 영토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독도와 해양경비정


그렇다면 그 이면에 숨은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근대 이후 일본은 정권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고 국내의 불만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웃나라들과의 갈등을 조장하는 행태를 보여 왔다. 1875년의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과 1876년의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의 체결, 1894년의 청일전쟁(淸日戰爭) 등은 그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국내정치적으로 볼 때, 오늘날 일본이 영토문제를 빌미로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외부적 갈등을 통해 국민 통합을 유도하려는 고전적 통치술을 답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역내의 군사적 긴장과 정치적 대립을 심화시킴으로써 자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려는 외교적 책략의 의미가 있다. 즉, 자국의 국력만으로는 러시아 및 중국과 대결할 수 없는 일본으로서는 미국과의 굳건한 안보적 동맹관계가 무엇보다 절실하며, 따라서 자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영토문제를 이용해서 주기적으로 역내의 긴장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일본의 무리한 영토문제 제기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심각한 정치적, 군사적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F. Benedict)는 유명한 저서 《국화와 칼 T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외교정책의 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견했다. “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일 사정이 허락되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장된 진영으로 구성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게 될 것이다.” 즉, 일단 국제정세가 분명한 긴장구도라고 판단되면, 일본은 언제든 과거의 군국주의적 행태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영토문제 제기는 동아시아의 심각한 군사적, 정치적 위기를 촉발할 수 있으며, 그러한 상황이 되면 일본은 언제라도 호전적 국가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따라서 우리가 독도에 관한 영토주권을 확고히 지키는 것은 우리의 영토주권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동아시아의 군사적, 정치적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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